[지원탐방] 광명선원 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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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선원 탐방기
2023년 4월 7일 대행선연구원 오진영
영탑, 공심공체 – 대행선사 법어- “ 영탑을 조성하는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 만이 이 몸통, 많은 생명체들을 다스리면서 사는 으뜸한 자가 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해야 이 세상 공기주머니에서 모두 꼼짝달싹 못하는 영령들의 마음들을 다 건져서 자유권을 얻게끔 해 줄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고苦를 없애려고 한다면 나온 그 자리에다 다시 놔야 없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없어질 수가 없어요. 조상 영가님들도 한꺼번에 거기 넣으면 한 도량에 공심이 되고 공체가 된다. 이런다면 영령들도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잔잔해진다고 했는데 이게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탑을 조성해서 영혼들이 자식들을 따르면서 스님네들을 따르면서 공부를 해서 훨훨 털고 나가시게 하는 겁니다.” 위의 글은 충북 음성에 자리한 광명선원 너른 영탑공원 한쪽에 세워진 기념석에 새겨진 대행스님의 법어 글귀이다. 부처님이 계시던 기원전 5~6세기경의 인도의 사상에서 업業(Karma)에 대한 개념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좋은 업과 나쁜 업이 내가 하는 행위나 내가 하는 생각이나 내가 하는 말에 의해 나에게 붙어서 좋은 업과 나쁜 업에 대한 과보가 1:1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선한 업을 더 많이 쌓는다고 해서 나쁜 업이 상쇄되어 없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대행스님은 신랄한 업의 개념을 꿰뚫어 보고 계시는 듯 하다. 하나의 괴로움을 없애려면 그 괴로움이 나온 자리에 다시 놓아야 한다는 말씀이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다. 괴로움이 나온 자리에 다 같은 마음이 되고 다 같은 몸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다 같이 공부할 수 있도록 가족의 영가들 모시는 영탑을 세운다는 의미를 3월의 끝자락 봄날, 광명선원에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영탑이라는 개념은 생소했다. 기존의 사찰들에 영가를 위해 위패를 모시거나, 죽은 이의 분골을 모아둔 납골당이나 나무에 뿌리는 수목장이 전부였다. 그런데 가족 모두를 모시는 영탑이라는 개념이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일반 사찰의 납골당은 대부분 사찰의 뒷부분 안 보이는 곳인 산속에 있는데, 광명선원의 영탑은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대웅전까지 올라가는 양지바른 완만한 경사 양쪽에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었다. 4만평에 12,000기나 되는 영탑이 모셔져 있다 하니 실제로 보는 규모는 더욱 넓어 보였다. 같이 간 대행선연구원 명허 간사님의 설명 중 인상 깊었던 내용 중 하나는 “실제 분골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영靈만을 모시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는 내용이었다.
최근 대행선연구원의 계절발표회때 진주지원장 스님의 지원소개 중 대행스님께서 알려주신 영탑 모시는 법이 떠오르며 잘 이해가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면 안된다고 강조하시던 대행스님의 말씀 또한 떠올랐다. 한마음법에 따라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혼백을 한마음에 귀일歸一케 하여 조상과 자손 모두를 한마음 안에서 평안케 하고자 하는 원리를 담고 있는 한마음 탑공원은 1986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광명선원 경내에 대행스님께서 큰 뜻을 갖고서 국내 최초로 조성하신 가족 탑공원이다. - 광명선원 홈페이지 발췌- 광명선원 홈페이지의 내용을 보면, 대행스님은 불자들을 많이 사랑하신 듯 하다. 죽은 이까지 살펴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는 그 의지가 바로 광명선원의 가족 탑공원이 아닐까 싶다. 서울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음성의 광명선원은 한적한 소도시에 자리 잡고 있었다. 3월 마지막 주 봄볕은 유독 추웠던 겨울을 벌써 잊게 했다. 광명선원에 입구에 불사 중인 일주문은 단청작업만 남겨두고 있었다. 단청이 완성되면 일주문 사이로 차가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웅장함의 크기는 본사 급의 큰 사찰 일주문과 흡사했다. 영탑공원을 조금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처음 만나는 곳은 문화회관이었다. 문화회관은 다 같이 모여 차담도 나눌 수 있고, 템플스테이도 할 수 있는 공간이라 한다. 대웅전에 인사를 드리고 나중에 둘러 보기로 하였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가운데 합각 면이 다시 올라와 있는 특이한 구조였다. 그 위에 구정탑의 맨 윗부분만 있는 것처럼 3개의 구만 보였다. 각 지원마다 탑의 구 개수가 다르다 하니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이다음 계절발표회 지원 소개 발표 시간에 들었으면 한다. 대웅전 내부를 들어가기 전 좌측에는 대웅전으로 건너가는 조그마한 돌다리가 있다. 그 돌다리 위에는 우측에는 ‘고집’ 좌측에는 ‘멸도’가 한글로 새겨져 있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4가지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 였다. 부처님 당시 세상은 신들이 만들어 그 신들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던 사상이 주류였고, 그 신들에게 자신의 길흉화복을 빌었던 사람들은 사제들이 올리는 기도만이 자신의 소원이 닿을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이다. 그로 인해 사제들의 독점과 카스트의 계급은 굳어져 갔고, 그때 새로운 사상이 떠오르며 인간 자체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인간의 해탈을 위해서는 Karma(업)를 없애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한다는 수행이 주류였기 때문에, 부처님 조차 6년간 고행을 하였다. 하지만 고행은 필요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선정에 들어 왜 괴로운지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었다. 그 4가지의 깨달음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갈애渴愛와 같은 집착을 없애면 괴로움이 멸하고, 괴로움과 집착을 멸하는 실현의 길이 ‘도’이다. 그 도는 바로 ‘팔정도’를 뜻한다. 이러한 이치를 이 다리를 건너면 해결이 될 것만 같았다. 괴롭고 집착의 상태에서 이 다리를 건너 대웅전에 들어가 마음을 닦으면 나올 때는 그 상태가 멸하는 실현의 길을 가는 것을 상징하는 작은 돌다리라 생각했다. 대웅전을 들어가니 팔작지붕 안쪽의 화려한 다포가 천연색으로 단청 되어 있었다. 진한 색의 단청이 아닌 천연물감의 은은한 단청이라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부처님의 뒷면에는 나무로 새겨진 목각 탱화가 있고 그 위에는 황금색의 닫집이 있어 은은한 단청과 황금색의 조화가 웅장함을 느끼게 하였다. 광명선원 홈페이지에 대웅전 불사 영상을 보면 목각탱 위에 있는 상징물은 대행스님께서 설명하신 모습 그대로 조성이 되어 있었다.
“ 맨 꼭대기에 그렇게 둥글게 그려놓고 점을 몇 개.. 서너 개 그려 놓으면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거든...” (광명선원 홈페이지 대행스님 영상 中)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자신의 내면을 통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진정한 풍요로움을 알기 바라는 대행스님의 마음으로 이 광명선원이 세워진 것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대행스님의 진영도 그려져 있고 여러 이야기가 곳곳에 그려져 있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대웅전을 나와 그 옆에 조성된 아미타부처님 입상은 광명선원 전체의 영탑을 관장하고 있는듯해 보였다. 아미타 부처님의 수인을 보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중생을 상.중.하 3품으로 나누고 이를 각기 또 3생으로 나누어 9단계의 수인으로 나타내는데, 광명선원의 아미타 부처님은 ‘하품상생 下品上生’의 손가락 모양의 수인이다. 출가는 하지 않더라도 위 없는 보리심을 내고 생각을 오로지 하여 다만 열 번이라도 아미타여래를 생각하고 그 이름을 외우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극락에 태어나고자 원을 세우는 이들에게 설법하고 이끄는 수인이다. 대웅전 뒤쪽으로 자그마한 전각이 있는데, 그 전각은 한마음선원 지원 중에 광명선원에만 유일하게 있는 산신각 이다. 왜 광명선원에만 산신각이 존재하는지는 향후 지원소개 발표 때 여쭤봐야 할 듯 하다. 산신각을 올라가는 조그마한 길 입구에는 힘들면 사용하라는 지팡이들이 세워져 있었다. 세심한 배려에 따스함이 느껴졌다. 산신각에 올라 내부를 들여다 보니 산신과 호랑이상이 있고 그 좌우로 단순하게 산인 듯한 느낌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차분히 느껴졌다. 내부 탱화는 공부하는 스님들이 그려져 있었고, 외부 벽화에는 대행스님의 치악산 수행 때 밤이면 문 밖에서 호랑이가 지켜줬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를 그린게 아닐까 싶었다. 귀여운 호랑이가 눈 오는밤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정겨웠다.
산신각에서 내려와 법당 우측 오솔길에 들어서면 아담한 탑이 조성 되어 있다. 연꽃과 부처님을 상징하는 듯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고 그 옆길을 더 지나면 불국사 석가탑 같은 탑도 볼 수 있다. 광명선원 경내를 돌아보니 사적비가 눈에 들어왔다. 광명선원을 세우게 된 계기와 처음 절터의 주지였던 스님의 내용도 적혀 있었다.
1974년 이지묵 스님이 창건하고 1983년 한마음선원에서 인수 하여 재창하였다는 내용이다. 창건주의 이름을 모두 새겨준 마음이 고맙게 느껴졌다. 경내를 더 둘러보기 위해 새롭게 다시 터를 닦고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니 대행스님의 말씀을 새긴 기념비가 보였다. 깨끗이 조성된 뒷 정원을 돌아 영탑들이 있는 곳을 들어가 보았다.
영탑은 각 성씨의 본과 함께 고유번호가 적혀져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일일이 이름이 적혀 있을것만 같았는데 담백하게 성씨의 본만 적혀 있어 신선했다. 말 그대로 가족의 영탑이었다. 그 많은 영탑 가운데 특이한 모양을 한 영탑들이 종종 보였는데, 어떤 가족 영탑은 ***家 라고 되어 있는데, 어떤 영탑은 ***公으로 되어 있기도 했다. 무슨 이유일지는 차후 알아봐야 할 듯 하다.
넓은 영탑공원을 다 둘러보고 한창 불사중인 스님들의 선방은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문화원은 열려 있으면 들어가 볼 요량으로 문을 열어보니 개방이 되어 있어 안을 돌아볼 수 있었다. 아담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내부는 아늑함을 주었다. 1층은 누구든 앉아서 차담을 할 수 있도록 조성이 되어 있었고, 2층으로 올라가면 여러 방과 다 같이 예불과 행사를 할 수 있는 실내법당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예전 산신각에 쓰여던 대들보를 버리지 않고 문화원 내부 장식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광명선원을 짧은 시간 안에 탐방을 하며, 새로운 곳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경험해보니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대행스님께서 이곳을 왜 첫 지원으로 하셨는지 조금은 알것만 같았다. 양지바르고 너른 곳에 신도들의 가족영탑을 조성하고 그곳에서 스님들이 수행하도록 한 것을 보고, 대행스님의 자비심에 대해서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까지 자비심으로 거두어들인 대행스님. 이 세상은 다같이 살아가고 다같이 수행하는 것이라 말씀해 주시는 듯 하다. 짧지만 이글로 첫 지원 탐방을 갈무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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