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대행선학술대회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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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대행선학술대회 스케치
2018년 10월 26일 금요일 안양본원 3층
제 2회 대행선 학술대회가 열리는 날, 대행선연구원의 학회지 창간호 ‘한마음연구’가 첫선을 보였습니다. 제 2회 학술대회의 자료집도 배부되었습니다.
동국대학교 총장 보광스님께서 대행선 학술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대회장으로 입장하고 계십니다.
발표자를 맞이하시는 재단이사장 혜수스님과 대행선연구원 이덕진 편집장
정준영 교수님과 인사를 나누는 보광스님
한마음과학원 이양희 부원장님과 황수경 교육정책실장 등 과학원 식구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대행선연구원 연구실장 혜선스님의 사회,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혜안스님의 집전으로 대회가 시작됩니다.
삼귀의
뜻으로 푼 반야심경 봉독
함께 하는 발원 1
함께 하는 발원 2
함께 하는 발원 3
이평래 대행선연구원장의 인사 말씀 순서입니다.
재단이사장 혜수스님의 환영사입니다.
“올해는 ‘대행선에서의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주제로 두 번째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선원 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한 발 더 대행선사의 가르침에 다가와 널리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사부대중 여러분 본래 자성의 길 환히 밝혀 나가시기 바라며 환영사에 갈음합니다.”
동국대총장 보광스님께서는 “대부분의 큰스님 열반 후에 그 유지가 계속 이어지기가 어렵습니다... 근데 6년이 지났음에도 대행 큰스님의 유지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형사제 간의 갈등 없이 이렇게 잘 이어오고 있기에, 스님의 열반 후 모습이 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평소에 큰스님을 정말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랐기 때문에 여법하게 문중이 잘 운영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신도님들이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한마음선원을 찾고 줄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는 오늘 대행 큰스님을 크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저도 용성스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대각사상연구원‘을 재단에서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열반 드신 지 거의 80년 만에 자료집을 최종 정리하여 5년에 걸쳐 20권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실제로는 24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산화하고 스마트 폰에서까지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더구나 색인을 잘 만들어서 누구나 석사 논문 박사 논문을 쓸 때 아주 손쉽게 논문을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근데 대행 큰스님은 6년 만에 두 번의 학회를 이렇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라고 축사를 해 주셨습니다.
식순을 마쳤습니다.
첫 번째 발표 순서로 ’대행선 수증관의 구조와 원리’입니다. 경북대 임승택 교수님의 사회로 동국대 김호귀 교수님의 발표, 정운스님의 논평입니다.
김호귀 교수 : “대행선에서 수행과 깨달음의 문제는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것은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단순한 수행으로서 일반적인 수행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 나아가서 수행이 깨달음의 작용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 한마음의 이치가 향상적인 입장으로 현성되는 일례가 믿음과 놓고 맡겨둠과 지켜봄의 관법수행이라면, 그로부터 터득된 일념의 지혜와 나툼의 작용이 오공법의 실천으로 현성되는 것은 향하적인 입장이다...
... 관법과 오공법의 관계에서 관법수행은 단순히 깨달음을 향한 수행보다는 깨달음에 바탕 한 믿음과 놓고 맡겨둠과 지켜봄의 행위로 드러나 있고, 오공법의 실천은 낱낱의 덕목이 보살도의 실천을 담보한 행위로 현성되어 있다. 때문에 수행과 깨달음이 딱히 구별되어 있지 않다.... “
이어지는 논평과 질문시간입니다.
정운스님 : ”... 그런데 ‘대행선 정립’이라는 미명 아래 대행의 사상이 학자들에 의해 어렵게 이론 정립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된다.[제 1회 계절 발표회 이덕진 교수님 발언 참조] 앞으로 대행선이 쉽게 읽혀질 수 있도록 논문이 쉽게 쓰여져야 한다고 본다...
... 대행선은 앞으로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거라고 본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근자 20여년 전부터 위빠사나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외 심리학이나 뇌과학 등 수많은 서양 불교가 유입되고 있다. 한편 불교적인 색깔을 배제한 제 3의 명상법이 유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대행의 가르침과 대행선을 어떻게 하면, 쉽게 많은 이들에게 보급ㆍ전파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것을 사부대중과 함께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회자 임승택 교수 : ”말 그대로 ‘사부대중과 함께 생각해 보기’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넒은 의미로 말씀해 주신 것 같다. 여기에 대해 발표자 분의 말씀을 들어보겠다.”
김호귀 교수 : “우리 전체의 앞으로 관심 분야라고 생각하고... ‘쉽게 많은 이들에게 보급ㆍ전파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이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두 글자로 답변 드린다면 ‘있다.’이다.”
다음은 울산대 김준호 교수님의 ‘초기불교의 自我와 無我觀’ 발표 순서이고, 논평은 서울불교대학원대학의 정준영교수님입니다.
김준호 교수 : “필자도 임승택이 제시한 ‘실천적인 무아’의 관점에서 부처님의 무아설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무아의 실천적인 성격은 경험되는 대상에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을 내지 않는 것으로 먼저 나타난다...
... 무아의 실천적 의미로 볼 수 있는 두 번째는, 인식의 과정에서 ‘내가…’라는 생각이 들어가는 순간을 직시하는 것이다...
... 모든 속박이 제거된 상태를 자신의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은 모든 속박을 지향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토대로 삼는다는 말이겠지만, 나아가 모든 속박이 제거된 경지를 추구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무한 신뢰하고 긍정한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따라 먼저 수행과 깨달음의 길을 가게 하는 주체를 긍정하는 자등명의 정신에 주목하였다. 이어서 무아설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무아’의 실천적 성격에 주목하게 될 때에는 자등명(自燈明)의 정신과 연결될 수 있음을 모색해보았다...”
정준호 교수 : “PPT는 내용을 전달하는 면에 있어서는 탁월함이 있지만, 동시에 문단 문장 하나하나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는 속도감이 있어서 따라가기가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평자는 자등명의 자아와 주인공의 관계에 대한 논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 대행선의 주인공은 자아인가 무아인가? 동시에 석가모니 가르침을 토대로써 계승하는 대행선의 특징은 무엇인지도 묻고 싶다...
... “자신이 참으로 자신의 주인(natho)이다. 그 밖의 누가 주인이겠는가.…(p.3)” 여기서 사용된 빠알리어 나토(natho)는 주로 ‘의지처’나 ‘보호자’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자아를 넘어서는 주체나 주인이라는 번역은 오히려 자아관념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와 무아를 동일한 구조로 보아 굳이 모순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논자의 설명처럼 무아는 일상의 경험 방식이다... [발표자가 말하고 있는] 일상을 벗어나 경험 현상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적 무아, 혹은 무실체성(無實體性)의 이치에 머물러 있는 잘못된 무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김준호교수 : “대행스님의 주인공은 자아인가 무아인가라는 첫 번째 돌직구를 날리셨는데, 제가 평가한 것은 자아의 측면이다. 그런데 그 자아의 측면은 수행을 해나가면서 긍정적 에너지를 택하는 쪽이 자아이다. 그런 측면에서 용어로서는 자아이다.
그러니까 자아라는 말에 선악이나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아라는 말을 어떤 맥락에서 쓰느냐가 중요하다... 주인공이라는 말은 자등명의 정신을 크게 고양시킴으로써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상과 실천을 고양시켰다, 그렇게 생각한다.
두 번째 문제는 어느 점에 방점을 두어서 설명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번씩 참모습과 만난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참모습은 본(보이는) 모습대로 말할 수 밖에 없다. 이건 니까야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본(보이는) 모습의 문제를 담고 있는 언어와 참모습의 내용을 반영하는 언어가 다르다. ...
참모습만 위대한 것이오, 라고 외치게 된다면 깨달음도 수행도 나의 삶과는 무관하고 별개가 되는 측면이 강해진다고 본다. 내 경험과 떠나있는 무아성(無我性)이나 내 경험과 떠나있는 깨달음은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런 논지를 구사해 보았다.”
이덕진 교수 : “주인공이라 그럴 때, 빌 공(空)자를 쓴 이유는 논리적인 측면에서는 사람 공(公)자를 해체하는 의미가 있고, 실천적인 면에서는 사람 공(公)자를 주장하는 면이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세 분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다.”
정준영 교수 : “붓다 역시 개념적 자아와 실제적 자아라는 용어를 다 쓰신다. 다시 말하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용어를 니까야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대행선의 주인공은 ‘무아(無我)’라고 본다. 무아에 더 가깝다고 보고, 실제(實際)에 더 가깝다고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행과 연결돼서 깨달음 자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역시도 무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얻어내는 것이 무아가 아니라, 이 실상이 무아이다. 이 실제 현재 모습이 무아인 것이다.
김호귀 교수님 발표처럼 이미 깨달은 상태라고 표현할수 있는 것이 초기불교에서 이렇게 연결이 된다고 보고 있다. 질문에 관련해서 대답한다면 제가 이해하고 있는 (주인)공은 무아이다.”
김준호교수 : “지금 밖에 나오면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보조배터리인데, 내 마음의 충전은 누가 시켜 주느냐? 자가 발전해야 한다, 자가 충전기를 동원해야 한다. 그런 그게 뭐냐?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등명 법등명의 정신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을 대행스님께서는 주인공이라는 것으로 좀 더 크게 우리에게 뭔가 생각해보라고 던지신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임승택 교수 : “두 분 선생님 의견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문제 의식들을 가지고 계속 논의하는 과정에서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좀 더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
점심 공양시간입니다.
다음 발표 순서입니다.
혜원스님 : “고승학 교수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고승학 교수 : “지엄의 교학은 일반적으로 ‘법계연기’라는 말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오직 청정한 것[淨品]으로 규정된 부처의 본성이 그대로 발현된 ‘성기性起[본래 성품에서 일어나 나타나는 것]’, 그리고 번뇌로 물들어 있지만[染分] 성불의 가능성을 유지하고 있는 여래장이
중생의 마음속에서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양상인 ‘연기(緣起)’라는 두 측면을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이 번뇌를 경험하는 양태와 그것을 벗어나는 과정은 이 중 후자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는데, ...
...불교의 무아와 공 개념이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개념적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을 상기할 때, 이러한 개념적 오류를 벗어나게 하는 유효한 수단을 화엄교학은 잘 갖추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천학 교수 : “... 고승학교수는 지엄 또는 화엄사상가들에게 구체적인 실천적 제시가 없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본 토론자도 늘 아쉬움을 갖는 부분이다...
...그런데 신만성불(信滿成佛), 초지성불(初地成佛)을 논하는 지엄의 화엄교학의 입장에서 볼 때, 믿음 또는 초지에 이르기까지 '화엄경'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이 구체적 실천 방법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혜원스님 : “다음은 중앙승가대 법상스님께서 ‘묘공대행의 수행체계와 자비교화에 대하여’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논평은 조계종 교육원 불학 연구소의 안유숙 교수님입니다.”
법상스님 : “... 이 주체적 해결자인 한마음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파악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대행선사가 설하는 한마음을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로 오인한다면 대행선사가 적시한 한마음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
안유숙 교수 : “... 발표문의 각 항목에서 불교 교학과 대행선사의 가르침에 관한 동이점들이 보이지 않는다... 대행선사의 체득의 내용을 불교 전통에서의 열반, 해탈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문맥이라면 발표자께서 어느 경전을 근거로 논의를 전개하는지 좀 더 상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
...학술적 관점에서 대행선사의 자유롭고 독창적인 가르침을 분석할 때 발생하는 간극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며, 활자 속의 언어 너머, 따뜻한 울림이 있는 진의(眞意)를 보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 점에 대한 발표자의 견해를 듣고 싶다.”
법상스님 : “논문에서 말했다.(???)”
차와 담소... 휴식 시간
다음 발표의 사회자, 발표자, 논평자 소개입니다.
이덕진 교수 : “다음 발표자는 동국대 박소령교수님이며, 논평자는 고려대장경 연구소의 정영식 교수님입니다.”
박소령 교수 : “묘공당妙空堂 대행(大行, 1927-2012)도 우리 인간의 본질을 자심(自心)과 공심(共心)이 모두 직결된 ‘한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한마음’은 그의 경험적 수증修證에 의하여 밝혀진 궁극적 진리의 표현으로써 그 사상적 근거는 불교전통의 일관된 ‘일심사상(一心思想)’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한마음’은 ‘일심(一心)’의 현대적 해석이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대행의 독특한 실천체계가 담겨있는 것이다...
...절대적 한마음 주인공에 철저한 근본을 두고 시대에 순응한 ‘주인공 관법’ 또는 ‘행주좌와 관법’으로 명명하여 그 실천체계를 정립한 점에서 대행선의 특징이 있다하겠다.
... 대행의 관법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먼저 대행의 관법은 한마음 주인공 오공의 원리에 곧바로 상응하는 당처의 실천법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대행의 관법은 불교 전통적 여래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 현대에 알맞게 믿고, 놓고, 지켜보고, 체험하고, 무심묘용을 실증하는 실천체계를 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대행의 관법은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언제어디서든 모든 행위에 있어서 쉽게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정영식 교수 : “초기불교의 여래선과 중국선에서의 여래선의 차이는 무엇인가? ... 대행스님이 주장하시는 관법이 주인공을 관하는 ‘관심(觀心)’이라고 한다면, 구체적 방법은 무엇인가?...
마조가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고 말할 때는 본각(本覺: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을 깨닫는 것)을 중시한 것으로 극단적으로 말하면 수행조차도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지만, 대혜가 말하는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고 하는 것은 시각문(始覺門:후천적으로 닦고 익혀서 점차로 마음의 근원을 깨닫는 관문)의 입장에서 ‘그러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으므로 간화선을 통해서 깨달아야 한다,
그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는 것은 이(理)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당대선과 송대선이 다른 것이다.”
이덕진 교수 : “사회자가 보기에는... 대행스님의 여래선은 인용문을 통해 본다면, 인도의 여래선과 중국의 여래선과는 관계없이 독창적인 견처(見處)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하고,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문제에 대해 대행스님은 시각(始覺)쪽인지? 본각(本覺) 쪽인지? 이 두 가지 점에 대해 설명해 달라.”
박소령 교수 : “기본골자는 변하지 않는다.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가 그윽하게 병합하기 위해서는 실천이 따라야 하는데, 반야공(般若空), 즉 공관(空觀)과 여래관(如來觀)이 동시에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선종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고 대행선에도 나타나고 있다...
대승선(여래선)과 중국선(조사선)이 차이가 나는 것은, 중국적인 문화와 언어 등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조사선이다. (조사선은) 스승에 의(지)해서 (종지를) 스스로 깨달아 나가는 것에서 (간화선에서는) 화두에 의해서 스스로 깨닫는다 것으로 변했다.
대행스님도 주인공 관법에 의지해서 스스로 깨닫는다. 이렇게 본질은 다르지 않지만 다른 방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
고승학 교수 : ”178페이지 주석 56번에 보면 기존 학설들을 정리해 놓으셨는데, 여래선 조사선을 구별하는 것이 문제가 있고 선은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뜻으로 인용하셨지만, 황금연 선생님의 논문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같이 묶어 놓은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질문드린다.“
박소령 교수 : ”잘 보셨다. 그 부분은 앞의 맥락과 맞지 않다, 정확히 짚어주셨다. 보완하도록 하겠다.“
이덕진 교수 : ”대행 큰스님께서 여래선이라고 하셨을 때, 독창성을 넣어서 새롭게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박소령 교수 : “대행스님의 언어로써 표현을 하신 걸 보면, 여래나 오공이라는 정의도 한마음으로 ‘나’와 이 세계가 다 연결되어 돌아가고 있다는 표현을 많이 쓰셨다. 대행스님 만의 여래선에 대한 입장은 따로 있으신 것 같다.”
포항지원장 혜문스님 : “큰스님께서는 마음은 체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형체가 없고 걸림이 없는 것이 어떻게 절대가 될 수 있는 것인지? 딱 그렇게 규정한다면 아뜨만이 되지 않나?”
“다음은 청강스님 (동국대)께서 ‘大行의 증명관 一考’라는 논제로 발표하시겠습니다. 논평은 동명대학교의 박재현 교수님이십니다.”
청강스님 : “선사는 참자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진정한 의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참자기가 나오기 이전의 의식적인 의정은 대부분 사량적인 의정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참나가 나온 이후에 의정이 진짜 의정이므로 더욱 더 내면 주인공에 놓고 관할 때 내면에서 해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박재현 교수 : “ ‘선사는 수행승과의 문답에서 인가란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인가한다고 하는 것이고, 선지식을 찾아가 자신의 인가에 대해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익히 알려진 선불교 전통에서 본다면 ‘그런 것은 인가가 아니다.’라고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래도 되는가? 이렇게 되면 문제가 많이 복잡해질텐데? 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 간화하고 묵조하고 묶어서 말씀하신 부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두 구절이 있다. 무슨 뜻인 지 모르겠다. 제가 문장을 읽고 이해가 안되면 제 수준의 같은 사람들은 다 이해가 안된다고 봐야 한다.
이 글의 형식을 뭐라고 봐야 할 것인지 (하는 의문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학문 연구, 논문이라는 틀, 그것을 전제로 본다면 이 글이 그 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면 학술연구자의 입장에서 이 글의 형식을 무엇으로 봐야 할 것인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일부러 논문이라는 틀 속에 약간 우격다짐 식으로 넣기 보다는... 이 내용은 증명해야 하거나 자료를 갖다 대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기 때문에 굳이 논문이라는 형식을 취할 필요가 있을까?”
청강스님 : ”보조스님이나 경허스님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가 인가를 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런 부분들을 보충해 나가겠다.“
이덕진 교수 : “특수성과 일반성이 있는데, 특수성의 경우, 지눌스님이나 경허스님이나 대행스님과 같은 경우는 인가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여기 문맥으로 보면 일반적인 학인의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주 일가를 이루신 분, 백 년에 한 분 이백 년에 한 분을 제외하고는 선불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스승에게 인가받는 것을 가중 중요한 철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편화되기는 아주 어렵다.
지눌스님과 경허스님은 천년 사이가 있다. 경허스님과 대행스님도 백년 차이가 있다. 백년 이백년 삼백년 차이의 우뚝한 봉우리는 누가 인가할 건가? 스스로 인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인가 받아야 한다.”
청강스님 : “증명관은 관법 중에서 독특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부분은 묵조선의 본증자각이라던지 본래성불에 의해서 묵조선의 경향이... 관법이 일반적으로 그렇지만... 증명을 하는 부분은 시각에서 본각으로 합체를 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덕진 교수 : “묵조를 이야기하고, 간화를 이야기하고, 시각을 이야기하고, 본각을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논쟁이 되어야 한다. 논쟁이 없이 뭉뚱그려 묵조, 간화, 시각, 본각을 이야기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혜원스님 : “우선 논문 주제가 대행의 증명관이라 했다. 이해가 안됐다. 내용을 보니 주인공을 증명하는 관이다. 그렇다면 대행의 관과 증명,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두 번째는 증명관의 원리를 말씀하실 때 한마음과 주인공을 어떨 때는 별도로 이해를 하고 있고, 어떨 때는 그냥 증명관으로 얘기를 한다. 견성 이후 또 다시 수행을 할 때, 그 견성은 초관인지 아니면 완전한 성불의 견성인지, 아니면 견성 이후의 관법이라면 보림인지... 그게 정리가 돼야 할 것 같다.”
혜선스님 : “ 김호귀 교수님은 본래성불의 본각적인 입장을 설명했는데, 청강스님의 글은 본각인지 시각인지 명확하지 않다. 믿음 지켜봄 맡겨둠에서 차제(次第)를 두고 있다.
요전 105쪽에서 ‘강한 믿음이면 그뿐이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는 매우 다양하므로 여러 가지 방편이 있게 된다.’ (라고 한다), 그런 설명이 부연되고 차제를 설명해야 하는데, 청강스님 글에서는 믿음 다음에 차제가 꼭 따르는 인상을 주고 있다. 큰스님 가르침이 잘못 전달될 수 있다.
246페이지에 보면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관법 수행을 일신하기 위해서 증명관 수행은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거야 말로 큰스님 가르침을 잘못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 이렇게 토를 다는 것은 스님 가르침을 오도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데 답변을 부탁한다.”
청강스님 : “혜원스님의 질문은 향후 선원에서 규명을 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혜선스님의 질문에 대해서는 믿음 놓음 지켜봄이 문맥상 순차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정리를 하겠다.
또 매너리즘에 관해서는 묵조선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 간화선을 주창했다는 그런 의미에서 증명관도 그렇게 썼다. 그 부분도 검토를 해서 시정하겠다. 큰스님 법문에서 증명관을 꼭 해야만 한다는 그런 단서는 아직 못 찾았다. 그런 부분도 보완하겠다.”
이덕진 교수 : “견성 이후의 수행에서 보림이냐 아니냐는 문제는 발표자가 숙제로 여기시고 공부를 더 하셔서 정확하게 보시면 되겠다.”
다음은 60분 자유 토론의 토론광장입니다.
좌장 권탄준 교수 : “우리가 대개 수행이라고 하면, 깨달음으로 이르기 위한 어떤 과정에서의 발심과 여러 가지 노력 행위가 수행이라고 전통적으로 정의를 해왔지만, 오늘 발표 내용을 보니까 전통 수행관, 깨달음관 하고는 다소 성격이 틀린 내용 들이 있지 않나 한다.
대행선에서의 수행과 깨달음에 관한 본질적인 정의가 종합적인 토론을 통해서 잘 마무리되면, 이 시대에 (어떻게) 깨달음이 생활 속에서 잘 구현될 수 있느냐가 분명하게 잘 정리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몇 가지 토론 주제의 중심 가닥을 잡았으면 좋겠다. 대행스님께서는 당신의 선을 여래선이라고 밝히셨는데, 다른 발표자들은 여래선과는 다른 간화선, 혹은 묵조선의 성격하고 가깝다는 그런 발표가 있었다.
또 박소령 교수님은 여래선이 조사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 되었다고 표현하셨는데, 전통 선가에서는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상위에 두는 평가를 하는데, 이런 문제도 거론되어야 대행선의 본질이 제대로 규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대행선의 관법이 믿음과 맡겨놓음 지켜봄이라는 세 가지가 수증법으로 대행선의 큰 특징을 보이는데, 이것이 깨달음의 실증인지, 전통에서 말하는 깨달음에서 나가기 위한 과정인지 오늘 분명하게 규명이 되면 학술대회가 의의가 있을 것 같다.”
김호귀 교수 : ”청강스님께 질문 드린다. 인가의 문제이다. 인가를 본인이 한다는 그런 말은 어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성실론 등 몇 가지 논서를 예를 드셨는데, 인도의 논서는 중국에서 형성된 선종과는 거리가 멀다. 보리달마 이후 문헌하고 그 이전 문헌의 용어는 분명히 다르게 쓰인다.
여래선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도 조사선이 등장하기 전과 후가 글자는 같아도 사용된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개인적으로 질문드리자면 개인적인 인가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조사라는 개념은 깨침과 인가와 전법의 세 박자가 어우러진 가장 전형적인 인물을 조사, 또 그 이어져 내려온 선풍을 조사선이라고 했는데, 조사선의 근본적인 뜻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을 것 같다. 답변보다는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니 참고하셨으면 좋겠다.“
청강스님 : “다른 선지식한테는 확인을 받는 인정이라는 그런 용어가 있다.”
김호귀 교수 : “짧게 답변하겠다. ‘인가’라는 말은 지금까지 써 온 그런 의미가 있는데... ‘인정’하고 ‘인가’는 동일하게 써온 용어가 아니다.”
김준호 교수 : “고승학 교수님께 질문드린다.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수행과 깨달음에 한마디 보탤 수 있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파악함이 전제가 되고, 현실에서 불편한 상황, 즉 고(苦)가 발생할 때 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과 깨달음이 문제가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화엄에서는 수행과 깨달음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
고승학 교수 : “화엄에서는 구체적인 실천의 지침이 부족한 편이다. 흔히 화엄에서는 교(敎) 즉 행(行)이니, 관(觀) 즉 행(行)이니 이런 표현을 많이 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창하게 말한다면 세계관을 변하게 하는 것이 화엄의 의도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의 작은 행동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숫다니 파타 등에 나오는 자등명 법등명의 핵심 용어는 디빠(dipa)라는 용어인데 이것을 섬으로 볼 것인가 등불로 볼 것인가 가지고 논란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월풀라 라훌라 같은 경우는 그것을 등불로 보는 것은 잘못 되었다고 얘기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준호 교수 : “그 말을 선택한 맥락이 있을 것이다. 섬으로 선택한 것은 의지처, 피난처,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쉬어가는 디딤돌 정도로 볼 수 있다면, 등불로 본다면 절대적인 성격이 들어가기 때문에, 즉 무아가 아닌 유아의 의미가 강해지는 측면이 있으므로,
남방에서는 이걸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는 쪽으로만 생각하지 근원적으로 실제적인 성격이 부여되는 측면을 피해야 하지 않나 해서 등불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제 생각은 지금은 오히려 무한 경쟁의 현실 속에서 공부의 자리, 기회, 에너지를 끌어내려면 조금 더 강한 표현도 필요하다고 본다.”
법상스님 : “ 여래선과 조사선의 분기점은 무엇인가? 대행 큰스님의 선사상을 어느 쪽으로 연결시켜야 하는가? 굳이 연결시키지 않아도 된다. 학자들에게 입증을 받으려고 하니까 말이 나오는 거지. 대행선은 대행선으로 가면 되지 입증받을 것이 뭐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여래선, 조사선, 인도에서 내려오던 사상과 연결고리가 부합될 수 있느냐 않느냐를 종합적으로 얘기할 수 있지 않는가?”
박소령 교수 : “정확한 분기점은 확신을 못하겠다. 원오 극근 선사와 대혜 종고 선사는 여래선과 조사선을 동일하게 본다. 달마의 선은 교(敎)에 의해서 종(宗)을 깨닫는다 했다.
중국학자 홍수평의 설에 의하면 혜능 이후부터 교학보다는 스승에 의해서 스스로 깨우치는 경향으로 된다. 이것을 조사선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방식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평래 원장 : “김호귀 교수께서 묵조선과 대행선의 유사성을 증명해주셨는데,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도 밝혀주시면 묵조선과 대행선의 접점에 대한 가능성을 더 확실히 규정지을 수 있지 않을까?”
김호귀 교수 : “뭘 주제로 드느냐에 따라서 차이점은 천차만별이다. 같은 조사선의 맥락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묵조선은 좌선을 강조한다. 근데 대행선은 좌선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또 묵조선에서 쓰는 공안이라는 용어와 대행선의 공안이라는 용어는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고 묵조선에서 화두라고는 안하지만 사유 대상이 되는 주제, 그것은 본인이 선택할 수도 있고, 스승으로부터 부여받을 수도 있고 어록을 공부하다가 의문이 생기면 사유 대상이 된다. 묵조선에서 사유라는 것은 전부 열어놓고 사유를 한다. 간화선과는 다른 사유 방식 중의 하나다. 대행선은 한마음 주인공이지만 묵조선은 다양한 대상으로 열려있다는 점,
또 하나 묵조선은 인가를 대단히 중시한다. 예를 들면 제자가 200, 300, 500명이 되더라도 인가를 받은 제자가 없다면 그 법맥은 단절이 된다. 단절을 안시키려면 인가받은 다른 종파에서 사람을 양자로 들여서라도 조사로서 법맥을 잇게 한다. 시간 관계상 줄이겠지만 차이점을 얘기하자면 많은 점을 언급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김호귀 교수 : “본래성불이다 하는 것이 조사선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처음 당나라 시대에 이런 주장은 세련되어 보이고 높이 평가되었다.
그런데 300여년 정도 내려가다 보니 살생을 하고도 욕설을 하고도 이것이 부처님의 행이다 하는 퇴폐적이고 악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당대에 형성된 순수한 조사선의 모습이 송대 쯤 오니까 많이 타락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강구책이 수행법으로 노출된 것이 간화선이고 묵조선인데, 특히 묵조선에서는 이미 깨달아있는 중생이니 수행할 필요가 없다니까 다른 것 하고 구별이 안된다. 배고프니 먹고 피곤하면 잔다니까 또 동물하고 구별이 안될 것이다.
수행할 필요가 없지만 그대로 하면 또 누구나 다 부처고 깨달음이라고 하니까, 그러한 악성을 탈피하기 위해서 수행의 표본은 좌선이다. 필요 최소한대로 수행하는 모습을 좌선으로 찾은 것이 묵조에서 좌선을 강조한 근본적인 이유다.
좌선을 여일하게 할 수 있다면 좌선하는 동안은 부처님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해서 좌선을 강조한 것이다... 묵조선의 특징은 좌선이다.”
혜선스님 : “초기불교 무아관을 말씀하실 때 (주인공에 대한 얘기가) 한쪽에는 무아다 한쪽에는 실체를 인정하는 것 같았는데, (큰스님께서는 주인공이란) ‘주인이면서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렇지만 처음 수행을 하면서 어떤 것을 붙들지 않으면 공에 떨어지니까,
그것을 자꾸 가다보면 잡은 것 자체도 놓게 된다고 하셔서 중생들의 (현실을) 인정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정된 실체를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무아다 라는데 관심을 두실 수는 없으신지?”
김준호 교수 : “절대적인 관념이나 생각이 왜 문제가 되는냐를 문제를 삼아야 된다고 본다. 부처님께서 아뜨만을 인정하지 않아서 우리도 인정하면 안된다가 아니다. 절대는 다른 가능성을 끊어버리는 것이 절대 아닌가?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 절대적 관념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이라고 본다... 그래서 자등명의 긍정적 측면과 무아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남방불교 중심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싶었다.”
이상호 박사 : “절대를 인정하게 되면 번뇌의 절대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불교가 지향하는 해탈 열반을 부정하는 결과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권탄준 교수 : “대행선에서의 한마음이란 것이 실천적인 입장에서의 무아라고 해석을 해도 가능한가?”
김준호 교수 : “원효스님의 번역 일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많이 등장하는 말이 일심(一心)이다. 일심을 근원적인 우주의 한마음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 저희들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일단 지금까지 합의된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하나로 보는 마음자리’ 이렇게 저희들은 풀었다. ... 하나로 볼려고 하는 마음씀씀이가 실천적 성격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평래 원장 : “고승학 교수의 발표에서 화엄경의 품(品)에서 얘기하는 것이 개념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그 속에 들어있지 않나? 그래서 그 단계를 밟아서 십지(十地)의 마지막 단계가 결과적으로 깨달음이 아닌가?
화엄경이 수행에 대한 실천이 약하다고 얘기하셨는데, 그런 차제적인 내용과 관련시켜 보면 꼭 그렇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여쭤보고 싶다.”
고승학 교수 : “화엄사상과 화엄교학으로 나눠서 얘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경전만 놓고 보면 말씀하신대로 차제적인 수행의 단계를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핵심만 뽑아내서 이론 체계를 만들어낸 교학적인 얘기를 하는 분을 보면 추상화되어 사장되는 경우가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십지품(十地品) 같은 경우 구체적으로 각 품에 대해 언급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놓지 않는 것이 있다면 초지에서는 그렇지만 십바라밀다를 포함한다고 얘기한다... 이론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쪽에 포커스를 두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것이다.
아무래도 교학에 오면 이론성은 강하고 실천성은 떨어지게 된다. 최근에 그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십지품에서 각각의 바라밀다를 강조한 것을 다시 봐야 한다는 그런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권탄준 교수 : “화엄의 수행은 보현행이 수행의 근본인데, 그러면 지엄의 법계관이 화엄의 보현행이라는 수행관과 함께 언급되었으면 논문이 더 빛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승학 교수 : “지엄과 같은 초기 화엄학에서는 보현행에 관한 언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좀 더 검토를 해보고 연구를 해 보겠다.”
혜원스님 : “한마음 주인공을 깨달아 생사고통을 벗어나고 나서 세 번 죽는 수행을 한다는 그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박소령 교수 : “세 번 죽는 것이 체험 이후... 지켜보기의 체험이 계속되면서 물리가 터진다는 말씀을 하시는 데, 물리가 터진다는 뜻은 정확히 모르겠다. 연구를 해봐야 한다.
물리가 터진 이후에 세 도리를 얘기하시는데, 처음 발견한 단계가 첫번째 죽음의 단계고 다음은 둘이 아니게 죽는 도리, 그 다음은 둘이 나닌 도리로 나투는 것, 저는 그래서 무심의 단계로 봐야 되지 않나? 책에서는 그렇게 (표현)했다.”
성범스님 : “여래선이냐 묵조선이냐 하셨는데, 1985년도부터 병원포교를 시작해서 현재 33년차 하고 있는데, 관법으로 제 자신이 수행을 하고, 상대에게도 그렇게 해서 많은 체험을 해 본 결과, 생활선이었다. 생활선이라고 명명하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덕진 교수 : “박 교수님 논문 180페이지에 [여래如來는 ‘일체 상하 사방과 사무사유四無四有 전체가 하나로 합쳐서 돌아가는 것’을 말하며] 라고 했는데... 여래선이라는 단어 자체의 사전적 의미를 대비해 보면, 여래의 교설에 의거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 여래선이다 했으니, 즉 경을 봐야 한다.
조사선은 이심전심이다. 마음에 즉(卽)해서 깨달으면 조사선이다. 중국 선종의 입장에서 여래선을 폄하하는 이유는 불립문자인데 경을 본다는 이유다.
인도로 넘어가면 기본적으로 부처의 경지에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여래선이다. 사전적 의미다. 중국 선종에서의 여래선은 부처님 교설, 경전을 봐서 깨닫는 것이고 마음으로 즉하는 것은 조사선이다.
이 세 가지 사전적 의미가 대행스님의 말씀과 어떻게 매치가 되는가? 물론 앞에서 말한대로 대행선은 대행선이지 여래선이다 뭐다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말씀하신 의도를 밝혀서 대행스님의 위치를 제대로 놓을 필요가 있다.
이 맥락에서 특별한 뜻이 있다고 보기보다는 그저 여래의 베품 정도이고 생활선이라는 말을 어시스트 하는 의미 정도의 여래선이다. 이것은 가정이다.
박교수님께서 경전 검색해서 여래선이라는 말 자체가 전체 글을 이끌어나가는... 전통적인 의미의 여래선과 매치되면 맞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대행스님께서 독창적으로 해석하신 여래선으로 봐야 한다.”
권탄준 교수 : “혼란스러웠는데 교수님께서 잘 정리를 해 주신 것 같다.”
이상호 박사 : “주인공 관법이라는 것이 2005년도 혜선스님의 한마음수행체계에서 믿음, 놓고 맡김, 지켜보기라고 해서 그것이 지금 학술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청강스님께서 증명관을 하면서 믿음과 놓고 맡기기로 증명관의 3요소로 끌어다 쓰시는데 그러면 용어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증명관이라고 하는 것은 ‘주인공, 네가 있음을 증명해,’ 라고 하는 한 문장이다.
그 한 문장이 가장 실체적인 부분인데, 거기다 ‘믿고 놓고 맡기기’는 근저에 깔려 있는 수행의 토대라고 볼 수 있지, 그것이 증명관의 소속된 요소로 보기는 힘들다.
증명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주인공 관법의 네 가지 요소를 거쳐서 그 중의 한 단계 믿음에서 증명될 수도 있고, 믿음에서 지켜보기까지 증명될 수도 있고, 점차와 돈오의 요소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증명이라는 부분은 주인공 관법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혜선스님 : “자발적 의증이라는 것은 (큰)스님의 표현을 빌면, 자기가 자기를 (발견)하고 나서 저절로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을 자발적 의증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자문자답이 자발적인 의증인가, 의도적인 의증인가?”
청강스님 : “자문자답이 의도적 의증일 수도 있다. 근데 그 의도적 의증도 신심이 있어 한 번 알아보고 싶다 이런 의도적 의증이지, 시간이 있어 한 시간을 해야겠다 이런 의도적 의증은 아니다. 이건 저의 의견이다. 이런 부분이 앞으로 저의 논문을 비판하면서 더 좋은 대행선사의 논문을 새롭게 내 놓으면 더 좋은 논문이 될 거 같다.”
권탄준 교수 : “제가 학회를 수십년간 다녀 봤다. 그런데 학회 분위기가 이렇게 엄정한 게 쉽지 않다. 정말 대단들 하시다.”
마무리로 선학과 원로교수이신 동국대 혜원스님께 말씀을 청했습니다.
“대행스님은 비구니로서 자취가 천지를 덮고 있기 때문에 저희는 한마음선원에 오는 것만으로 광명이 몸을 덮는 것 같아서 뿌듯합니다. 불교계의 불미스러운 일도 대행 큰스님이 계심으로 해서 자잘한 일로 덮혀지고,
앞으로 우리가 부처님이 길을 가는 데 대행스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고 생활선으로 반영할 수 있는 학술대회를 개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가 한국 비구니사에 더 큰 종적을 남기는 학술대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본원 주지이신 혜솔스님의 마무리 인사입니다.
“오늘 학술대회 아주 맛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처음 큰스님 인연이 닿았던 그때 저희들에게 내려주셨던 법문에서부터 최상승의 깨달음의 세계까지 꺼내놓고 드러내 놓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각자 역할에 맞는, 그리고 그 그릇에 맞는 맛들을 담아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승단에도 그런 숙제가 남겨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대행선 연구원이 발전해 나가고, 저희 어른 스님 가르침을 펴낼 뿐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더 많은 생명들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마음 내 주십시오.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더 정진할 수 있는 그런 수행자가 됩시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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